두 가지 장면
장면 하나. 1990년대 중반, 중동의 어느 도시. 밤을 꼬박 새워 서류를 작성했다. 사무실 형광등 아래, 타이핑 소리와 복사기 소리가 섞이고,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일했다. 국제 프로젝트의 입찰서였다. 수백 페이지의 기술 제안서, 수천 항목의 물량산출서(BOQ), 회사 자격 서류, 재무제표, 주요 인력 이력서까지. 이 모든 것이 손으로, 혹은 초창기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돼야 했다. 오타가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치거나, 수정액을 바르고 다시 써야 했다. 규정된 부수만큼 복사하고 제본하면, 최종 제출물은 대형 여행 가방 10개를 가득 채웠다.
제출 마감은 단 한 번이었다. 1분을 넘겨도 자격이 박탈됐다. 그 가방들을 차에 싣고 발주처로 달려가던 긴장감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다. 수령 도장을 찍어주는 순간의 안도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그 고요함.
장면 둘. 2023년, 서울 카페. 스마트폰을 꺼내 ChatGPT에게 입찰 제안서 초안을 부탁한다. 10분 후, 수십 페이지 분량의 초안이 완성된다. AI 번역 앱으로 아랍어 버전을 만들고, 화상회의 링크를 공유해 발주처 담당자와 실시간으로 검토한다. 자료의 제출과 협의는 실시간으로 이루어 진다. 서류는 온라인 포털에 업로드한다. 그 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확인 이메일을 기다린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 있지만 같은 일이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세계다. 이 두 세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것이 이 책의 이야기다.
사피엔스가 설명하는 변화의 본질
나는 하라리의 논리에 많은 부분 공감을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Sapiens, 2011)'에서 인류의 역사를 세 가지 혁명으로 압축했다. 약 7만 년 전 인지혁명(Cognitive Revolution), 약 1만 2천 년 전 농업혁명(Agricultural Revolution), 그리고 약 500년 전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이다.
그 중 하라리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인지혁명이다. 그 이전의 인간과 이후의 인간을 가른 것은 단 하나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능력'이다. 돈, 국가, 법인, 종교... 이 모든 것은 사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믿기 때문에 실재한다. 이 허구를 공유하는 집단이 힘을 갖는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의 체계다. 어떤 것이 가치 있다고 다수가 믿으면 시장이 형성된다. 그 믿음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변곡점이다. 그리고 변곡점은, 항상 기술의 언어로 찾아왔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성경을 라틴어 독점에서 해방시켰을 때, 신앙에 대한 믿음의 구조가 바뀌었다. 증기기관이 등장했을 때, 노동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바뀌었다.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정보에 대한 믿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AI가 등장한 지금, 지식과 창의성에 대한 믿음이 바뀌고 있다.
◆ 하라리가 말하는 '허구의 힘'
사피엔스 중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침팬지는 150마리 이상의 집단을 구성하지 못한다.
개체를 직접 알고 신뢰해야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수백만, 수십억이 협력한다.
비결은 '허구'다. 국가, 화폐, 종교, 법...
우리는 만난 적도 없는 사람과 '달러는 가치 있다'고 믿으며 거래한다.
그 믿음이 글로벌 경제를 가능하게 한다.
기업도 허구다. 법인(法人)이란 법이 만들어낸 허구적 인격이다.
그러나 그 허구가 수천 명을 먹여 살리고, 국가 경제를 움직인다.
비즈니스의 변곡점은 어떤 허구를 더 많은 사람이 믿느냐의 싸움이다.
Nokia의 브랜드를 믿느냐, iPhone의 생태계를 믿느냐.
블록버스터의 편의성을 믿느냐, Netflix의 스트리밍을 믿느냐.
그 믿음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이 변곡점이다.
하라리는 또한 변화의 속도가 가속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지혁명에서 농업혁명까지 5만 8천 년. 농업혁명에서 과학혁명까지 1만 1,500년. 과학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300년. 산업혁명에서 디지털혁명까지 200년. 디지털혁명에서 AI혁명까지 50년.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변곡점도 같은 패턴을 보인다. 아날로그에서 윈도우까지 수십 년, 윈도우에서 인터넷까지 5년, 인터넷에서 아이폰까지 7년, 아이폰에서 팬데믹까지 13년, 팬데믹에서 AI까지 2년.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다. 앞으로의 변곡점은 우리가 준비되기 전에 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다음 변곡점을 예측하는 능력이 아니라, 어떤 변곡점이 와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그 구조의 이름이 피벗이다.
이 책의 여정
이 책은 다섯 개의 변곡점을 연대순으로 살핀다. 각 변곡점마다 세 가지 질문을 따라간다. 첫째, 이 변화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둘째, 이 변화로 누가 힘을 얻었는가. 셋째, 이 변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역사적 에피소드, 세계적 기업들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지금까지의 현장 경험이 한 흐름으로 엮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하나의 능력이 생기기를 바란다. 다음 변화가 왔을 때, 그것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먼저 보는 능력. 그리고 그 방향에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설계하는 능력.
그것이 피벗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전부다.
'출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 2 변곡점 인터넷과 글로벌화의 시대2001 ~ 2006년 ·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됐다 (0) | 2026.03.17 |
|---|---|
| PIVOT 제 1 변곡점 윈도우와 이메일의 등장 : 1장. 1995년 8월 24일,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3) | 2026.03.12 |
| PIVOT 피벗 1부 아날로그에서 인터넷까지 : 제 0 변곡점아날로그 시대~ 1994년 · 종이, 팩스, 텔렉스의 세계 (0) | 2026.03.10 |
| PIVOT 피벗- 목차 (0) | 2026.03.10 |
| 책을 시작하며 - PIVOT 피 벗 : 시장이 바뀔 때마다 이긴 사람들의 비밀 (0) | 2026.03.08 |